전자기기는 대체로 모델명을 정하는 규칙이 있기에 어느자리의 어떤 문자가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면 어떤 제품인지 파악이 가능하지만, 일반인에게 이런 모델명은 암호와도 같기에 대부분의 제품은 특정 사용자층을 겨냥한 브랜드로 제품을 구분하고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PC 컴포넌트 중 이러한 브랜드 마케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하드디스크 제조사인 WD의 BGB(Black, Green, Blue) 마케팅으로 국내에서는 2008년부터 WD코리아를 통해 본격적인 BGB 마케팅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각 제품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WD 블랙은 7200RPM과 대용량 캐시 메모리, 성능 향상을 위한 기술을 적용한데다 5년 보증을 지원, 비싸지만 고성능이 필요한 사용자 층을 겨냥했으며, WD 블루는 성능 향상 기술이 제한된 대신 캐시를 줄이고 보증 기간을 낮춰 적절한 가격대 성능비가 필요한 사용자층을 겨냥했다.
블랙과 블루가 성능에 중점을 둔 반면, 가변 RPM을 기반으로 소음과 발열을 줄이고 비교적 낮은 RPM에 따른 성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캐시를 늘린 제품으로, 성능보다 하드디스크의 자료 보관 기능에 중점을 둔 제품이다.
이후 BGB를 알리기 위한 마스코트까지 선정하며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며, 이는 이후 NAS용 Red, 영상 감시용 퍼플(Purple)등 용도별 색상 마케팅을 이어가면서, 사용자들에게 WD HDD의 BGB는 스펙에 따라 명확히 구분된다는 인식을 뇌리에 심어주게된다.
WD BGB 마스코트 Brent(Blue), Gus(Green), Blake(Black)
단지, BGB 마케팅이 막 도입되던 2010년도 즈음에는 각 제품별 특징이 비교적 명확하였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플래터당 밀도가 높아지고 기술이 향상되면서 블루의 입지가 의도치않게 줄드는 문제가 발생하게된다.
실제로 블랙과 그린은 갈수록 용량을 높여가면서 6TB까지 출시되고 있지만 그린과 차별화된 블루의 특징 중 하나인 7200RPM 블루 모델은 1TB 이하 모델에 한정되어 있는데, 이는 블루의 성능이 블랙을 위협하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WD의 데이터 시트에 따르면 WD 블랙 1TB와 블루 1TB의 최고 성능은 150MB/s로 동일하다.(WD 블랙 데이터 시트, WD 블루 데이터 시트)
결국, WD 블랙을 위협하는 7200RPM 블루의 용량이 1TB에 머물고 있는 동안 용량과 성능을 키워온 WD 그린은 최소 1TB 이상 용량 모델에서 사실상 블루를 대체하는 위치에 포지셔닝된 상황이 지속되어왔다.
WD, 명백히 다른 컨셉 그린에 블루의 탈을 씌운 소비자 기만행위
2012년 1TB 용량 제품 출시 이후 신규 모델이 나오지 않던 블루 라인업에 지난 9월 갑자기 6TB 이상의 블루 모델이 등장했고, 사용자들은 환호를 내질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소비자 기만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새롭게 등장한 블루 모델의 플래터 동작 속도가 블루의 상징인 7200RPM이 아닌 그린의 5400RPM인데다, 1TB와 500GB 모델에는 기존 7200RPM 블루와 새로운 5400RPM 블루가 섞여있는 것.
그래도 여기까지는 새롭게 추가된 5400RPM 모델이 7200RPM 모델과 스펙상 동일 성능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블루의 트레이드마크인 7200RPM이 아닌 점은 아쉬워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업데이트된 블루 라인업과 기존 그린 라인업의 성능은 완벽히 똑같다
하지만 새롭게 업데이트된 블루모델의 성능을 동일 용량의 그린 모델과 비교하면 완벽히 동일하다. 비록 업데이트된 블루 모델이 5400RPM 고정, 그린 모델은 여전히 가변 RPM인 인텔리파워로 표시되고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블루 모델들이 그린에 색만 바꿔 고성능 제품으로의 이미지 세탁을 시도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새롭게 업데이트된 WD 블루는 성능의 블랙, 가성비의 블루, 용량의 그린이라는 WD의 BGB 마케팅을 근간부터 흔들어 버리는 행위인데다, 관련 사실을 모르고 기존 BGB 마케팅만을 기억하는 사용자라면 블루니까 당연히 그린보다 고성능이겠거니 하고 샀다 나중에 성능 차이가 없는 것을 알게되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자충수 평가되는 블루의 탈을 쓴 WD 그린, 차라리 블루를 없앴다면...
한가지 의아한 점은 WD의 대응이다.
이미 커뮤니티에서는 관련 내용이 알려진 이후 부정적인 반응이 쏟아지고 있지만, WD는 새로운 블루 모델 출시 이후 아직까지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린을 완전히 없애고 블루로 통합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렇게되면 고성능과 저장용 두 가지 모델로 정리되므로 경쟁사와 차별화가 어려우며, 경쟁사의 저장용 모델에 대응하는 모델로 고성능 모델에 대응하는 모양새가 된다.
물론, 성능상 7200RPM 모델과 경쟁이 가능할 수도 있고, 이를 통해 WD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늬만 블루고 속은 그린이라는 것이 알려진 상황에서는 '그래봐야 그린'이라며 HDD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을 비싸게 팔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차후 현재의 그린에 위치하는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더라도, 이 때는 더 고성능을 낼 수 있는 모델을 일부러 속도를 낮췄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을텐데, 차라리 유명무실해진 블루 라인업을 없애고 그린과 블랙 두 가지 라인업으로 재편했다면 지금과 같은 소비자들의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공들여 쌓아온 BGB 마케팅 원칙을 흔들고 WD의 브랜드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 뻔한 블루의 탈을 쓴 그린 출시는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소비자들의 반발을 불러오는 것이다.
